2011.02.09 DIARY

1.
나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격한 가풍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와 같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의지할 것이 못되는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투정을 부리지도, 잘 울지도 않았나 보다. 어른이 된 지금, 어머니께 여쭤보아도 그렇기 때문에 편했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내 기억력도 그리 못 미덥진 않은 것 같다. 다만 딱 한 번 투정을 부린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디서 무료로 나눠주는 인형극의 티켓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티켓을 제시하면 입장료를 무료로 해주었고,  인형극을 보고 싶었던 나는 일이 있어서 안된다는 어머니를 졸라서 결국 보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티켓은 낚시였고, 별도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꼬마였던 내가 봐도 그 인형극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재미있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그것은 나의 마지막 투정이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당시의 기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니 아마도 그 때의 경험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나 보다.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넉넉치 못한 형편에 장난감 같은 걸 별로 만져보질 못했다. 나 역시 사달라고 보채지도 않았고. 그러던 와중에 부모님이 장난감을 사준다고 하셔서 가게에 갔다. 다소 비싼 걸 골라도 된다는 말에 두 개의 후보군을 정해두었다. 하나는 로보캅을 닮았고, 푸른 빛을 가지고 있었던 인형. 또 하나는 붉은 색의 로봇으로 제법 거대한 크기였던 것 같다. 로보캅을 닮은 인형은 비교적 작은 크기였지만 합금 비율이 높은지 제법 고가였다. 그래서 후자의 로봇을 골랐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로봇은 바로 나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나중에 생각해보니 푸른 빛이 나는 인형은 메탈 히어로 시리즈의 우주형사 샤이다기동형사 지반이 아니었나 싶고, 붉은 로봇은 GM을 닮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몇 일 후… 크리스마스 때 유치원에서 산타크로스가 등장하여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 영감한테 받은 것이 전에 구입했던 이데.. 아니, 붉은 로봇이었다. 애초에 산타 따윈 믿지도 않았던 시크한 유딩이었지만, 이 경험 역시 나에게는 제법 충격으로 다가왔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뭔가 동심 파괴잖아(… ) 문제의 이데.. 아니, 붉은 로봇은 변형/합체 기능이 생략된 통짜 로봇으로 유일한 기믹은 등 뒤의 스위치(3개)를 누르면 효과음과 함께 빛이 나는 것이었다. 불현듯 그 시절의 기억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 몹쓸 기억력.

2.
앞서 언급했듯 사소한 것은 잘 기억하는 편이지만, 뭔가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몹쓸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사람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졌는지 그 사람의 이름, 그 사람과의 추억은 시간이 지나도 남는데 유독 얼굴만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써보아도 얼굴만은 잘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무척 싫어했던 것 같다. 기억이 안나려면 몽땅 안나면 좋을텐데 얼굴만 떠오르지 않는건 뭐람? 그 때문인지 기억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는 한편, 반대로 쿨하게 잊어버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어린 마음에 어차피 상대방도 날 기억 못할텐데, 나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소한 것은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고, 이젠 얼굴도 제법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그 사람을 잊고 싶지 않은 무의식이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나의 존재는 희미한지 상대방은 나를 곧잘 잊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 그 사람과 거닐던 길, 그 사람을 생각하며 들었던 노래.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어떨까. 가끔은 이 괴리에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그래서 사람은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고, 그 추억으로 살아가는가 보다.

3.
이틀 전엔 너무 답답해서 무작정 한강으로 나섰다. 그간 화창했던 날씨가 그 날은 유독 짖궂어 안개와 쌀쌀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겨울의 한강공원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 시간 가량 그 근방을 계속 걷다 눈에 들어온 것이 벤치였다.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겨울의 벤치에서 문득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넌 공원의 벤치같아, 여자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이제와서야 아무래도 좋지만, 당시에는 좀 놀랐다. 그는 여자 동기들에게 휘둘리는 듯한 내 모습을 보고 그런 표현을 썼나 보다. 사정을 잘 모르는 그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어떤 감정이었던 간에 나는 진심을 가지고 대했다고 생각한다. 바보 같아서,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것에 대한 이유는 없잖아. 그 때문에 새로운 기억도 생겼고, 이는 언젠가 추억으로 바뀌겠지. 

쉽게 잊혀지는, 희미한 존재인 나는 어쩌면 벌써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원의 벤치면 또 어떠리.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누군가가 나로 인해 편안함을 느꼈다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누군가가 나로 인해 도움이 되었다면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희미한 존재가 아니었을테니.

4.
기억과 추억이 투정부리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잿빛 기억 속의 시크한 유딩이 다 큰 어른이 되어 투정이라니. 어쩌면 지금의 나는 힘든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투정할 상대도, 그것을 받아줄 사람도 없다. 야, 신난다…
▲ 2011.02.07 여의도 한강공원 iPhone4

덧글

  • 게온후이 2011/02/10 00:58 # 답글

    저작권에 걸립니다 고갱님은 아니고
    전 어릴때는 할머니를 되게 졸라뎄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어디갔는지는 참...
  • NIZU 2011/02/10 23:49 #

    보통 크면서 다 처분하게 되더군요.
    여담이지만 전 과학상자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끝내 못 만져봤습니다.. -_-;
  • 베른카스텔 2011/02/10 20:20 # 답글

    뭔가 올해는 시작부터 모든 것이 답답하네요.
    고민한다고 무슨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긴 한데 ㅠ_ㅜ
  • NIZU 2011/02/10 23:50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힘내봐야죠.. T^T
    기운내셔서 하루 빨리 답답함이 해소되시길 바랍니다.
  • ssita 2011/02/10 20:44 # 삭제 답글

    저도 가난한 집의 다섯째로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투정 한번 한적이 없답니다. 뭘 사달라고 조른적도 거의 없구요. 옷도 대부분 형제들 옷을 물려입었구요. 그 덕분에 요즘 마눌님께 자꾸 이거 사달라고 조르는 것 같습니다. 에헴.

    기억이라는 것이 참 믿을게 못 되는 것 같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에 대해 너무 확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함을 느낀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까운 기억부터 잊어가고, 먼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 진다는 얘기가 있죠. 요즘 그말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답니다.

    투정할 상대는 이웃블로거가 있지 않습니까? 기운내세요. 대전 오시면 술 한잔 사드리겠습니다. ^^
  • NIZU 2011/02/10 23:51 #

    아, 저도 요새 누군가에게 막 조르고 싶어요.
    그럴 사람이 없다는게 문제지만.. orz.

    대전에 계셨군요.
    말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ㅡ^
  • 울트라김군 2011/02/12 20:04 # 답글

    투정을 받아줄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것을
    종종 너무 늦게 깨닫고는 합니다.;ㅂ;
  • NIZU 2011/02/12 22:41 #

    항상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기도 하고.. -ㅅ-;;
    그래도 가끔은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요즘같은 날에는요..
  • 바사라 2011/02/16 19:27 # 삭제 답글

    저 역시 어릴때 조르진 않았지만, 특별히 어떤날에는 부모님이 사주시긴 하셨지요. 그 장난감들중 튼튼한 완구들은 아직도 집에 가지고 있다는.
    제가 egloos를 잘 사용하진 않아서 댓글 같은것도 잘 않남기지만, 강동구 어딘가에서 절 찾으신다면 밥 한끼정도는 사드릴수 있음`.`
  • NIZU 2011/02/16 23:10 #

    안녕하세요, 바사라 님.
    먼저 방문 감사드립니다.
    저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쯤 다 처분하고 남은게 없네요..
    강동구에 사시나보네요, 몇 번 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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