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BOOK

[스포일러 있음.]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아마 두가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참신 혹은 지루.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 간의 다양한 약속이 존재한다. 두뇌명석한 명탐정과 멍청한 경찰, 밀실살인, 알리바이 트릭, 다잉메시지 등... 사전에 정해둔 약속 때문에 그 설정이 부자연스럽더라도 납득하지 못할 상황만 아니라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명탐정의 규칙"은 그런 추리소설의 약속을 추리소설작가 스스로가 낱낱이 파헤치는 작품이었다. 소설은 사립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와 경감 오가와라 반조를 메인으로 진행되며 이들은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양, 상투성과 억지를 바탕으로 사건을 풀어나간다. 작품에는 추리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12가지의 패턴이 나오는데 그것을 이들이 해결해나가며 추리소설의 정해진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며 이를 비판한다. 상당히 자학적이며 독자입장에서 궁금한 점을 콕콕 찔렀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많은 작품들을 읽었고, 또 읽어나가는 과정이지만 "명탐정의 규칙"은 그 중에서 가장 지루하게 읽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추리소설의 문제점을 작가 본인이 비판한다는 것은 참신하고 좋았다. 그런데 이미 닳고 닳아 진절머리나는 패턴을 굳이 있는 그대로 써먹으면서 하는 소리가 "작가의 편의주의에 의해 자주 채택되는거지요."라니. 각 패턴을 철저히 파헤친뒤 농담으로 마무리짓는 이 소설 특유의 방식도 쓴웃음만 짓게 만들었다. 작가가 작가를 비판하고, 추리소설의 작법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작가 자신의 추리소설에 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은 좋았지만 그 방식이 나에겐 너무 맞지 않았다. 또 추리를 비틀었다는 점과 진부함을 비꼬는 덴카이치의 멘트들은 평론가에게는 찬사를 받았지만 일반독자,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을 자처하는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뭐, 원래 블랙코미디라는게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추리소설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정해진 결말 속에서도 나름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에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애초에 이런 소설이 나오게 된 것 자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자신감이지 않았을까. 덕분에 추리소설이 가지는 매너리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익숙한 패턴들이 있어야 말로 추리소설의 묘미를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최후에는 탐정 자신이 범인일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는 등, 작가가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고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느낌의 내용전개는 독자가 신(=작가)이 되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무릎팍 무릎팍팍!!
TV드라마로까지 제작된 이 소설의 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내가 독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 추리소설에 대한 내공이 모자라서 이 책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고. 명탐정과 명청함을 연기해야 했던 경찰, 그리고 조연들의 사정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반복되니 지루하더라. 과연 추리소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P.S
탐정소설에서 우리 조연들이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절대로 명탐정보다 먼저 범인을 알아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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