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커레이드 호텔 BOOK

[스포일러 있음.]



히가시노 게이고의 등단 25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작품이라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masquerade'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작품은 추리소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추리물로 규정짓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범인 색출을 위한 절차적인 과정보다는 작품을 이끌어가는 내러티브에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번쯤 고민해봤을만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고, 트릭이나 추리보다는 힐링에 좀 더 비중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적 배경이 된 호텔은 특별함과 화려함을 지닌 한편, 밀회의 장소로 활용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가면이라는 소설의 주제와 맞아 떨어진다고 느꼈다. 그동안 호텔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들은 객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을 이용한 밀실살인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갔지만, 호텔 전체를 배경으로 삼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호텔리어라는 직업군을 전면에 등장시켜 다양한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예전에 선배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요. 호텔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손님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요. 호텔리어는 손님의 맨얼굴이 훤히 보여도 그 가면을 존중해드려야 해요. 결코 그걸 벗기려고 해서는 안 되죠. 어떤 의미에서 손님들은 가면무도회를 즐기기 위해 호텔을 찾으시는 거니까요. (P.394)

도쿄에서 3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현장에 놓은 숫자 메시지로 다음 범행장소가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임을 알게된 경시청. 닛타 고스케를 비롯한 일선 형사들은 호텔리어로 위장해 다음 사건을 막기 위해 잠입수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를 담당하는 호텔리어인 야마기시 나오미는 똑부러지는 일솜씨와 직업의식으로 닛타의 반감을 어느새 존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처음에는 낯선 일이었으나 나오미의 도움으로 어느새 전문 호텔리어가 되어가는 닛타와 그의 형사 일에 빠져들며 그동안 호텔리어로서 보지 못했던 손님들을 형사의 눈으로 보게 된 나오미.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 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전문가적인 면모였다. 언제,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나오미는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견지하며 손님을 대한다. 이런 직업관은 형사인 탓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닛타와 충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직업적인 면을 이해하고 사건의 단서를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호텔을 찾고, 그들이 말하는 불만을 '대항이 아닌 대응'으로 깔끔하게 해결하는 나오미의 모습은 호텔리어라는 직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다.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해 범인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투숙객 역시 단순히 호텔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범행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점도 좋았다. 닛타 형사는 가가형사 시리즈의 가가 교이치로나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가와 마나부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였는데, 그들과는 달리 감정적이고 젊은 혈기를 십분발휘하면서 때로는 실패도 맛보는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고 그와 달콤한 분위기를 풍긴 나오미 역시 (어렵겠지만)차기작에 등장했으면 한다.

반면, 범인의 정체와 범행 수법(숫자 트릭은 식상했지만.)은 신선했지만 범행 동기는 허무했다. 술술 읽히면서 재미있고, 범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뭔가 허탈한 느낌은 정통 추리소설팬에겐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같다. 마치 헐리우드 오락영화에 힐링을 더한 분위기는 호오가 나뉘겠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드라마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고 작가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 작품들을 읽으며 실망을 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그런 내 안의 평가를 어느 정도 불식시켜 주었다.

P.S
그거야 뭐, 한마디로 말해서 냄새예요. 당신은 화장이 진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냄새가 나요. 좋은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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