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어 BOOK

[스포일러 있음.]



한때 생계를 위해 고서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미우라 시온은 자신의 경험에 상상력을 더해 '월어'를 써내려간 것 같다. 고서점이라는 개념은 익숙치 않았지만 고서적(古書籍)만을 취급하는 헌책방 정도로 이해하고 읽은 이 책은 읽기 전과 읽는 중, 그리고 읽은 후의 느낌이 판이하게 달라 새로운 기분이다. 저녁 무렵, 무궁당이라는 고서점에 세나가키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무궁당의 당주인 마시키는 그와 오랜 친구 사이로 세나가키는 고서 매입을 함께 가자는 청을 하러 온 것이다. 집안 대대로 고서점을 운영해 온 마시키 가(家)와 그곳에서 고서에 대해 공부한 세나가키의 아버지 덕에 친해진 세나가키와 마시키는 처음 만난 어린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무궁당을 이어받아야 할 마시키의 아버지가 그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옥기'라는 고서를 세나가키가 알아보고, 이에 충격을 받은 마시키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 행방불명이 된다. 이런 사정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는 죄책감이 흐르고 예전처럼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세나가키의 제안으로 고서 매입을 위한 짧은 여행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둘은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나누고 불편한 진실과 그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나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하려던 참이지? 신경쓰지마, 옛날 일이야, 잊어버려, 라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면, 그것이 오히려 아직도 그때 일을 잊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핵심을 피한 채, 하지만 서로 번갈아 가며 조심조심 손을 내민다. 고대에 있던 법의 판정처럼, 끓는 물에 손을 대서 화상을 입지 않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다. 세나가키도 마시키도 벌써 10년 이상이나 끓는 가마솥 주위를 맴돌고 있다. (P.140)

서로를 이해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갖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한 편으로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서 매입을 위한 여정에서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한 두 사람이지만 우연히 나타난 마시키의 아버지로 둘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두 사람은 과거의 사건을 딛고 정면을 응시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로 상처받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버린 상황은 십여년이라는 세월동안 곪아터져 폭발하고 만다. 하지만 시간이 그저 흘러가기만 한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짐과 자신의 잘못으로 친구의 아버지가 떠나버렸다고 여긴 죄책감을 덜어내고 감정에 솔직해진 두 사람을 보며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에는 예쁜 표지와 '월어'라는 제목이 주는 여유와 한가로움에서 오는 무언가에 대한 성찰이 주제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책을 읽으면서는 처음 받은 느낌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가슴 속에 비밀을 품은 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미묘한 관계와 우정을 느꼈다. 그리고 읽고 나서 출판사 서평을 보니 두 청년의 사랑 이야기란다. '월어'와 비슷하게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에서도 유사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두 작품 모두 남자들의 우정과 해체된 가족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라니… 그렇다고는 해도 노골적이진 않고 두 인물 간의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줄타기하지만 사랑보다는 우정에 좀 더 가까운 브로맨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의도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확실히 사랑보다는 우정에 가까웠기에. 어쨌든 불행한 우연이 겹치며 생긴 사건으로 오랜 세월동안 상처받은 마시키와 세나가키가 마침내 마음의 속박을 풀어내는 과정은 조금 밋밋했지만 그래서 더 현실감있었다. 이런 밋밋함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는데, 마시키와 세나가키의 애매한 관계나 결말로 향할수록 두루뭉술해지는 이야기는 뚜렷한 색채를 띄지 않아 아쉬웠다. 제목처럼 은은한 달빛 아래서 연못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고 할까. 줄곧 슬로우 템포를 유지하는 속도감과 한적한 시골 오솔길을 걷는듯한 서정성은 호오가 갈릴 것 같다. 개인적으론 술술 읽히긴 했지만 그리 큰 재미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는 내가 전개가 빠른 작품을 좋아해서일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시키와 세나가키의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마음 속 깊은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냈다는 사실과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니까. 애매한 결말은 BL소설로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꼭 '월어'의 등장인물이 아니더라도 본격적인 BL소설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P.S
보상받지 못하면 알고 있어도 집착해버린다.

덧글

  • 베른카스텔 2014/08/17 15:05 # 답글

    뭔가 표지가 신선하네요. 특히 캘리가 맘에 들어요.
  • NIZU 2014/08/18 15:47 #

    그쵸? 저도 표지에 꽂혀서 읽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라 아주 조금 아쉬웠어요.
    원서의 표지도 예쁘지만 한국판 표지가 특히 마음에 듭니다 :)
  • 2014/09/01 17: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9/02 01:5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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